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의 역사적 배경과 함의 -1
목차 |
제 1장 서론 : 이란-이라크 전쟁의 배경과 의의 제 2장 : 이란-이라크 전쟁의 발발 원인 2.1 지정학적 요인 2.2 이란-아랍 민족적 갈등요인 2.3 이란-이라크 종교적 갈등요인 2.4 이란-이라크 정치적 갈등요인 제 3장 : 이란-이라크 전쟁의 경과 제 4장 : 이란-이라크 전쟁의 영향 4.1 양국에 미친 영향 4.2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 제 5장 : 결론 5.1 이란-이라크 전쟁의 의의 5.2 연구의 한계 및 과제 |
Ⅰ. 서론 : 이란-이라크 전쟁의 배경과 의의
중동 분쟁이란 일반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핵심으로 한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 세계 국가 사이에 벌어진 여러 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그렇게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란-이라크전쟁(1980~1988)이나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중동 분쟁과 연관되어 생각하기 싶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란-이라크 전쟁의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이 과소평가 받기 쉬운데, 여기에서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한 배경과 원인 그리고 이란-이라크 전쟁이 국제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겠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0년 9월 22일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 군대가 접경지대에 있는 이란의 서부지역을 침공하면서 발생하였다.
이란과 이라크는 같은 이슬람권에 속해 있으면서 국경을 맞댄 인접국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갈등과 대립 속에서 냉전관계를 유지하다가 장장 8년의 계속된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 표면적 원인으로는 샤트알아랍 수로의 영유권을 둘러싼 여러 차례의 다툼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민족적 · 종교적 ·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즉, 두 나라 간에 형성된 뿌리 깊은 적대감이 장기적인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이란과 이라크 두 국가 모두 현대 사회에 중요한 자원인 석유가 생각되는 중동 산유국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란과 이라크 두 국가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소련과 페르시아 만 연안의 아랍 국가들이 개입된 분쟁이라고 볼 수 있다. 8년여 간의 장기간 전쟁으로 백만 명이 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고, 2천억 달러 이상의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은 중동 지역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에 영향을 주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0년 9월 22일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면서 발생하였다. 군사행동의 주목표는 샤트알아랍 강의 획득 및 이란의 혁명적 정권의 타도였다. 이라크는 선전포고 없이 공격했지만 그들은 전쟁을 진척시키지 못하고 이란에게 격퇴 당한다. UN 안보리의 휴전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는 1988년 8월 20일까지 백만여 명의 희생자를 내며 전쟁을 계속한다. 2003년에 마지막 포로가 교환되었다.
Ⅱ. 이란-이라크 전쟁의 원인
2.1 지정학적 요인
고대 大페르시아 제국을 꿈꾸는 페르시아 만의 경찰국가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샤의 끊임없는 야심은 정치, 경제적으로 이라크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979년 2월 이슬람 혁명으로 샤 정권의 붕괴에 따른 이란의 국력약화 결과, 이라크가 페르시아 만 지역에서 자국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동시에 이란으로부터의 잠재적인 위협을 예방할 수 있는 호기를 포착하였다.
과거 샤의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국력 앞에서 수모를 당해왔던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은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야기된 내정혼란을 이용하여 자국의 전략적 노출에서 오는 이슬람 혁명으로 야기된 내정혼란을 이용하여 자국의 전략적 노출에서 오는 긴장감과 불안감을 제거하는 한편, 이 지역에서 이란과 적어도 대등한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 자신의 정권 안정에도 유리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란과 이라크는 샤트알아랍 수로에 관한 영유권 문제가 발단이 되어 8년간의 전쟁을 벌였다. 페르시아 만 입구에 있는 샤트알아랍 강(이란명은 아르반드 루드)은 상류 쪽은 이라크 국내를 통과하지만 하류 쪽은 이란과 국경을 이루는,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수로는 자원이 풍족한 페르시아 만과 연결되어 있어서 양국의 석유 수출에 중요한 통로였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양국 간에 갈등이 빈번했고 이로 인해 1937년 공식적인 국경선을 정하는 국경협정을 맺었다.
국경협정에도 불구하고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은 양국 간에 체결된 '알제협정'(국경협정)을 이란 측이 파기한 데 있었다. 국경협정을 맺을 당시, 중동의 실력자였던 영국이 이라크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며, 이란은 단지 강 하구의 호람샤르와 석유 수출항인 아바단에서만 샤트알아랍 강 중앙을 통과하는 탈웨그선을 국경으로 하면서 강 전체가 이라크 영토가 되었다. 후에 이란은 국제법의 관례를 들면서 국경선을 정정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영국의 세력을 등에 업은 이라크의 완강한 거부와 군사적 측면의 열세로 외교적 갈등만 존재했었다. 그러나 영국이 이라크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하면서 이라크는 국내외적인 정치적 불안을 겪게 되고 그동안 단독으로 점유해 온 샤트알아랍 수로를 이란과 공유할 것임을 내용으로 하는 알제리 조약을 1975년에 체결했다.
알제리의 알제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정상회담 때 이란의 팔레비 왕과 이라크의 혁명위원회 부위원장 사담 후세인 사이에는,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샤트알아랍 수로의 지배권과 호르무즈 해협에 위치하는 3개 도서의 지배권을 이라크가 갖는다는 국경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1979년 이란은 호메이니가 혁명에 성공하자 압도적인 군사력을 배경으로 이라크에 압력을 가해 샤트 알 아랍 수로에 대해서는 가항수로(可航水路)의 중간선을 국경으로 하고, 3개 도서에 대해서도 사실상 이를 장악하는 행동에 나섬으로써 양국 간에 국경분쟁이 빈발하였다. 그 후 이란이 혁명의 후유증으로 내부적 불안을 겪고 있는 틈을 타서 이라크가 선제공격을 가하여 이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2.2 이란-아랍 민족적 갈등요인
이라크는 셈족 계통의 아랍인이지만 이란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페르시아인 이다. 아랍인들은 이슬람 이전의 시대를 자힐리야(Jahiliyya), 즉 무지의 시대라고 말한다. 따라서 아랍인들은 이슬람 이전의 전통과 역사를 부정하면서 이슬람 이후 아랍사회에 나타난 문명만을 추종한다. 하지만 이란인들은 이슬람 이전의 시대를 그 자체로 거대한 문명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아랍 무슬림에 의해 나라가 점령당해 종말을 맞이한 자존심 있는 제국이었고 또한 이란인의 정체성을 지속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아랍인과 이란인의 뿌리 깊은 대립의 역사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후 그의 후계자들이 정복사업을 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랍인들은 637년 페르시아의 사산조(224-651)를 멸망시키고 아랍인들을 중심으로 이슬람제국을 건설하였다. 페르시아가 이슬람제국의 일부로 병합되면서부터 이란인들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란인들은 아랍인들에 대한 자신들의 우위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이란인들은 다수파인 수니파를 버리고 소수파인 시아파를 선택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서 생존할 수 있었다. 16세기 초에 등장한 사파비조(1501-1732)는 이슬람세계에서 최초로 시아파를 국교로 한 페르시아 민족국가였다. 이때부터 아랍인들과 이란인들은 이슬람세계의 두 민족으로서 반목과 대립관계를 유지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