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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과 전염병 -3

ADMILAN 구단주 2020. 4. 18. 22:12

십자군 전쟁

2차 십자군 전쟁 - 아달리아(Adalia, 오늘날 터키의 안탈야)

 

2차 십자군 원정(1147~1149) 시기인 1148년 초에 유행한 전염병은 프랑스의 루이 7세와 그가 보낸 기사들이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 해안에 있는 아달리아(Adalia, 오늘날 터키의 안탈야)를 떠나자마자 수천 명의 보병과 순례자들을 쓸어버렸다. 전쟁에서 진 십자군은 터키의 시리안시티를 공격해 되찾으려고 했다. 이 지역은 1차 십자군전쟁에서 프랑스가 차지해 40년이 넘도록 지배했으나 당시에는 셀주크 투르크가 지배하고 있었다. 프랑스 왕과 독일의 콘라드 3세는 각각 병사들을 끌어 모아 이 신성한 땅을 차지하고자 했다.

114710월 투르크는 아달리아로 오고 있던 콘라드의 군대를 전멸시켰다. 프랑스의 루이 7세는 군대를 많이 잃기는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아달리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달리아의 지형에 익숙한 셀주크 투르크는 프랑스 군대에게 틈을 주지 않고 기습 공격을 했다. 프랑스 군대는 좁고 위험한 산악 지역에서 고생했다. 게다가 셀주크 투르크는 가축을 아주 많이 방목해 농촌을 파괴했기 때문에 겨우 살아남은 십자군은 음식물과 생활필수품을 얻을 수 없었다.

1148130, 프랑스군이 아달리아에 도착했을 때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 도시를 통치하고 있던 비잔틴은 음식과 생활필수품을 너무 비싸게 파려고 했다. 또한 루이 7세가 땅 위로 진군하는 것을 포기하고 항해를 해서 안티옥으로 가려고 했을 때, 비잔틴은 필요한 배와 필수품을 마련해주기로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겨울비가 그칠 때까지 몇 주를 기다린 뒤에 루이 7세와 기사들은 새로 만든 배를 탈 수 있었다. 보병과 순례자들은 비잔틴의 호위를 받으며 남쪽으로 행군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달리아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2차 십자군 원정 동안 루이 7세가 종교의식을 위해 임명한 오도 목사는 전염병에 대해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가 왕과 함께 전염병이 돌기 전에 도시를 빠져나가 상황을 몰랐기 때문인 것 같다. 십자군들이 탈출하기 시작하자 전염병은 곧 도시 전체로 퍼졌고, 사망자가 늘어나면서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망률이 높고 병이 빠르게 퍼졌다는 점, 항구로 들어오는 새로운 배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수인성 전염병인 장티푸스나 이질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전염병은 집단생활을 하고 있고, 체력과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병사들이 더 잘 걸렸다. 오도에 따르면 수천 명의 프랑스 군인들은 투르크 군사들이 무서 워서라기보다 전염병이 두려워 이 도시를 떠나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들은 탈출하지 못했고, 투르크의 공격을 받은 뒤에는 병에 걸리지 않은 군인들까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3차 십자군 전쟁 에이커(Acre)

 

3차 십자군 원정(1189~1192) 때인 11898월부터 약 2년 동안 비타민 C 결핍증인 괴혈병을 포함해 한 가지 이상의 질병이 에이커(Acre)에서 번져나갔다.

십자군전쟁이 벌어지는 내내 수시로 맹위를 떨친 기근과 전염병은 전쟁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해 기독교도들을 위협했다. 하지만 11916월에 포위당한 이슬람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기독교도들은 목표를 달성했다.

이보다 앞서서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에이커를 1187년에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이 점령했고, 그해 예루살렘도 차지해 버렸다. 살라딘의 정복에 놀란 유럽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로부터 2년 뒤 다음 십자군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시리아 땅을 잃은 프랑스는 서쪽에서 동맹군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반격에 나서 11898월에 에이커에 도착했다. 이탈리아와 덴마크에서 온 동맹군이 뒤쫓아 와 프랑스 군대에 힘을 보탰지만, 성스러운 땅을 되찾는다는 맹세를 한 영국 왕 헨리 2세와 프랑스 왕 필립 2세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서로 오랜 기간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에이커를 포위한 군대가 궁지에 몰렸다. 이슬람 수비대는 용맹스럽게 계속 저항했다. 어느새 십자군이 살라딘의 군대에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십자군 병사들은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프랑스 지휘관 루지낭의 아내와 두 자녀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시빌라의 여왕도 목숨을 잃었다.

지오프리가 기록한 것을 보면 괴혈병 증상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1191년 겨울과 봄에 줄기차게 비가 내리는 동안 십자군은 가혹한 기근에 시달려 풀, 개가 먹다 남긴 뼈, 말까지 잡아먹었다. 그러자 전염병이 돌아 팔다리가 부어오르고, 이가 빠졌다. 병에 걸린 군인들 중 겨우 몇 사람만 살아남았다.

이러한 극한 상황은 몇 주 지나지 않아서 나아졌다. 프랑스 왕 필립 2세는 4월이 다 가기 전에 지원군을 데리고 왔고, 6월 초에는 헨리 2세가 사망한 뒤 영국 왕좌에 오른 리차드가 또 지원군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런데 영국 왕은 도착하자마자 병이 들어 심한 열이 나고, 머리카락과 손톱이 빠져버렸다. 아마도 심한 괴혈병이 병사들 사이에 여전히 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왕은 곧 회복해 군대를 다시 모았다. 리차드가 가지고 온 배 25척에는 음식과 무기가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사이프러스를 정복해 얻은 전리품도 가득했다. 이것은 굶주림에 지쳐 있던 십자군에게 큰 힘이 되었다. 또한 프랑스 함대가 에이커 항구를 봉쇄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몇 주가 지나자 군수품을 지원받지 못한 이슬람 수비대는 더 버티지 못하고 11916월에 항복함으로써 에이커는 기독교의 손안에 들어갔다.

 

5차 십자군 전쟁 - 다미에타(Damietta)

 

5차 십자군 원정(1217~1221) 때 괴혈병이 심하게 돌아 1218년부터 1219년까지 이집트 다미에타(Damietta)를 점령하고 있던 십자군의 15~20%가 목숨을 잃었다. 이슬람 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나일 강 삼각주를 먼저 공격한 것은 예루살렘을 되찾으려는 십자군의 전략이었다. 이집트의 항구를 손에 넣음으로써 십자군은 이슬람 제국이 예루살렘을 내놓고 항구를 돌려달라고 간청하기를 바랐다.

1218년 봄, 십자군은 다미에타 반대편에 진을 쳤다. 다미에타는 나일 강 반대편에 있었고, 술탄 군대가 성벽 밖에서 이 도시를 보호하고 있었다. 강바닥에는 수많은 사슬을 쳐놓았고, 강 가운데에는 요새화된 탑이 십자군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석 달 동안 노력한 끝에 십자군은 탑을 차지했고, 8월 말에는 쇠사슬을 잘라 없앴다. 십자군에게 진 이슬람군은 가라앉은 배로 강을 가로막으면서 전투를 계속했다.

여러 달이 지나도록 십자군과 이슬람군은 끝나지 않는 전투를 계속했다. 11월 말에 심한 폭풍우가 몰려왔는데, 마치 십자군 주둔지를 씻어내려는 듯 사흘 동안 비바람이 몰아쳤다. 홍수가 나서 텐트가 물에 잠겼고, 음식을 싹 쓸어가 버렸으며, 배도 쓸려 내려갔다. 이슬람군도 피해를 당했지만 십자군은 피해가 더 컸다. 그런데 폭풍우가 지나가자마자 전염병이 십자군에 퍼졌다. 역사가들이 기록한 내용을 보면, 잇몸에 종창이 생기고 이가 빠지고, 다리가 부어오르며, 피부는 곪거나 궤양이 생겨 검게 변했다고 한다. 이러한 증상으로 볼 때 괴혈병을 의심할 수 있다.

또한 이 전염병으로 십자군의 5분의 1에서 6분의 1이나 되는 군인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이중에는 설교를 통해 십자군에게 큰 위안을 주고 있던 로마교황의 공식 사절도 들어 있었다. 십자군을 곤경에 빠뜨린 전염병은 이슬람 군과 다미에타 시민들에게도 퍼졌다. 게다가 술탄 군대 안에서 반란 음모가 밝혀지자 다급해진 술탄은 12192월 초 군대에 퇴각을 명했다. 전염병으로 인한 이슬람군의 피해가 워낙 컸으므로 십자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나일 강을 건너 다미에타로 들어갈 수 있었고, 121911월에 드디어 다미에타를 점령했다.

 

* 생각보다 내용이 방대해서...다음편에 마지막 마무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